전후 복구와 무상원조
우리나라에 대한 외국의 무상원조는 1945년 8.15 해방 이후 시작되어, 미군정 시기 및 6 · 25전쟁을 거쳐 1950년대 말까지 우리나라 경제 재건을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전후 복구와 무상원조
기간 |
내용 |
1945~1960 |
- 미국을 중심으로 제공된 외국 원조는 30.2억 달러 규모로 식료·의약품 등의 긴급구호와 물자원조 및 산업설비 투자
형태로 이루어짐
- 이는 전후 인플레이션 억제와 재정 안정에 기여하였으며, 1960년대 후반 이후의 고도성장을 위한 교통, 전력,
제조업 등의 산업 기반 구축에 상당한 역할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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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년 개발계획과 적극적 외자도입
1950년대 말 우리나라에 대한 미국의 원조는 양적으로 감소함과 동시에 질적으로는 유상원조로 전환하였습니다. 이에, 미국 이외 선진국으로부터의 자본 확보를 위한 노력이 시도되었고, 이승만 정권 말기인 1960년 1월에는 ‘외자도입촉진법’이 제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적극적 외자 도입 노력은 박정희 정권의 5개년 경제개발계획 수립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5개년 개발계획과 적극적 외자도입
기간 |
내용 |
제1차 (1962~1966) |
- '외자도입촉진법'을 전면 개정하고 관련 방침 및 법률을 제정하여 공공차관 유치정책 적극적으로 실시
- 이 시기에 이루어진 투자의 절반 이상이 외국 자본으로 충당되었고, 이는 공업부문 발전의 바탕이 되는 석유정제 ·
비료 · 시멘트 등의 기간산업과 전력 · 운수 등의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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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1967~1971) |
- 외자도입법 정비와 외교 노력으로 인해 외자 도입증가
- 연평균 9.7%의 고도성장을 달성하였지만, 국제수지 악화 및 대외 의존도 심화 등의 부작용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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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1972~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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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1977~1981) |
- 중화학공업 건설에 의한 산업구조 고도화가 개발 전략이었던 만큼 왕성한 투자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해외차입자금급증
- 해외차입은 지속적 고도경제성장의 기반이 되었으나, 박 대통령 암살, 농작물 흉작, 제2차 석유 파동 등의 국내외적
요인으로 인해 1979년 이후 성장은 주춤한 가운데 외자도입은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대외채무잔액팽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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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차 (1982~1986) |
- 그간 고속 성장이 초래한 문제들을 시정하기 위하여 인플레이션 억제, 계층간의 소득격차 시정, 복지 증지, 민간주도
경제로 전환을 기치로 1984년 이후를 제2의 도약기로 선정, 다시 높은 성장률 기록
- 이 과정에서 대외채무잔액이 1985년 말 세계 4위(468억 달러)를 기록하는 등 무거운 채무상환 부담을 안는 결과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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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이후 |
- 같은 시기에 채무위기에 빠진 중남미제국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1986년 채무위기 위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남
- 일관적으로 추진되어온 수출지향형 성장노선과 1980년 초부터 실시된 안정화 정책, 그리고 구조 조정의 정책적
대응이 채무위기의 극복 요인으로 작용
- 1985년부터 시작된 소위 『3저 현상』, 석유가격 저하, 금리 저하, 엔화에 대한 원화 하락 등으로 인한 경상수지 흑자도
우리나라 채무위기 극복에 유리하게 작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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